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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의 발전 역사를 통해 알아 본 한국과 중국의 차문화 본문
[서론]
오늘 날 수많은 기호 음료 중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지키고 있는 음료가 있다. 바로 “차” 다.
한국의 차 산업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삼국사기>> 에 따르면 “차는 선덕왕 (선덕여왕, 재위 632~646)때부터 있었으나, 이때에 이르러 성했다” [1]다는 구절이 나온다. 이로부터 알 수 있는바 한국의 차는 현재까지 1300여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러나 긴 발전역사에 비해 차의 대중화가 잘 이루어지지 않은 현상은 실로 의아한 부분이다. 차의 대중화는 일반적으로 1인당 연간 차 소비량을 기준으로 삼는데, 목포대학교 국제차문화학과 교수인 조기정 교수님이 쓰신 “중국차의 대중화 과정 고찰”에 따르면 2014년도 한국인의 1인당 연간 차 소비량은 170g으로 전체 순위 39위를 차지했는바 1위인 터키(3158g), 2위인 아일랜드 (2191g) 에 비교해 턱없이 적다[2]. 이에 반해 중국은 차의 발원지이자 세계 최대 차 생산, 가공, 소비, 무역 대국으로 매년 2/3 가량을 내수로 소비하고 있고 경제적인 발전, 소득수준의 향상 및 건강에 대한 인식의 확산 등과 더불어 차 소비량 또한 매년 증가 하고 있다. 차를 소비 함에 있어서 모두 긴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중국에서는 차 문화가 뿌리 깊이 안착되고 대중화가 진행되었지만, 그에 반해 한국에서의 차 문화는 왜 그렇지 못했을까? 이 논문은 이런 질문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차는 커피와 같은 일종의 기호 식품이다. 사람들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고 또 도태될 수도 있는 음료수 중 하나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를 연구 모델로 할 수 있었던 건, 차가 단순히 음료수를 넘어 사람들의 생활 양식에 영향을 주고 나아가 음료수 이상의 작용을 했던 시기도 있었기 때문에 차는 기호품 이상의 문화를 형성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아시아적 가치론 하에서 아시아인들은 그들이 유교문화와 전통에 내재하는 규율과 기강, 충성, 근검, 교육 등의 노동과 생활 윤리를 중시함으로써 사회적으로는 건강하고 정치적으로는 안정되며 경제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사회를 유지해 왔다[3]. 차 문화 또한 역사적으로 서로 다른 종교 또는 정책, 사회 양상과 더불어 변화되었고 문화 또한 발전과 쇠퇴를 거듭해왔다. 때문에 각 역사 시대별로 차의 발전과정을 살펴보는 것 또한 차 문화를 알아 감에 도움이 될 것이다.
두 나라의 차 문화를 비교하기 위해선 두 나라에서 발전 역사가 비슷하고, 또 현재까지 사람들이 애용하는 차를 분석 모델로 삼아야 한다. 이 논문에서는 “녹차” 를 분석 모델로 삼았다. 녹차는 한국과 중국 두 나라가 공통적으로 즐겨마시는 음료다. 한국과 중국 차 문화의 공통점은 녹차 문화가 중심이라는 것이다. 두 나라 모두 전통적으로 녹차 문화를 발전시켜왔고 지금도 그렇다. 두 나라에서 녹차로 차 문화를 형성하게 된 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는 바 오랜 시간 동안 동아시아에서 만들 수 있었던 차는 기본적으로 녹차밖에 없었다. 차의 제조기술은 쪄서 만드는 증제법에서 덖어서 만드는 초제법으로의 발전과정을 거쳤다. 그러나 15세기에 들어와서 초제법이 주류가 되었고 17세기에 이르러서야 발효차인 홍차 문화가 형성되었다. 때문에 제조기술을 놓고 보더라도 녹차를 연구 모델로 삼는 것이 타당한 것이다.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한국과 중국의 발전 형태를 비교하려고 한다. 우선 중국과 한국에서의 녹차 문화의 역사적 흐름을 시간의 순서대로 정리한 다음 그 발전과정에서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존재하는 지를 알아보고 이를 통해 현재 한국에서 차 문화를 발전시키고 대중화시키는 것에 대한 시사점을 제공하려고 한다.
[중국의 차 문화 발전 역사]
차 문화는 중국에서 가장 먼저 형성되고 발전했지만 중국인 모두가 차를 마시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기원전 2세기, 은과 주의 교체시기부터 존재했던 차는 중국에서도 처음에는 차나무가 생산되는 특성 지역에서만 즐겨 마시는 음료였다. 사천을 중심으로 한 서남 지역에서 양자강을 따라 동남지역으로 차 마시기가 전파된 것은 순조로웠지만, 차나무가 생산되지 않는 회하 이북의 사람들에게 차는 왜 마시는 알 수 없는 이상한 음료였다. 위진남북조 시기 북방에도 차가 소개되었지만 본 지역 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익숙한 것을 고수하려는 성향과 남방 문화에 익숙하지 않았던 북조 통치자들로 말미암아 차 문화가 꾸준히 발전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은 위진남복조 이후의 왕조인 수나라에 이르러 변화를 가져왔다. 수나라의 통치자 양견은 수를 세우고 군사적, 정치적 통일을 이루었다. 그러나 경제적, 문화적 융합 또한 필요했고, 수양제 양견은 남북을 잇는 운하를 개통함으로 남과 북의 활발한 교류를 이루어왔다. 남과 북의 무역 교류 가운데서 차 문화 또한 북쪽으로 전파되었다.
수나라가 운하를 통해 남과 북을 이어주고 차 무역이 이루어 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면 당나라에 이르러 중국의 차문화는 더 없이 활발해졌다.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차의 생산과 공급이 원활했다는 것이다. 차나무는 아열대성 식물로 온대에서 열대에 이르기까지 넓은 범위에서 생장이 가능하다. 또한 차나무는 비옥한 토양을 필요로 하지 않는 다는 점 또한 차 재배지 확대에 매우 유리한 조건을 마련했다. 당나라 시기에 원거리 무역과 더불어 차를 소비하는 지역이 확대되면서 차 생산은 놀라운 증가 추세를 보였는 바 43개의 주군, 44개 현에서 차가 생산됐다[4]. 풍부한 차 생산력은 중국의 차 시장이 기호품 단계를 넘어 필수품 단계까지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고 국경 너머로까지 보급되는 단계까지 이르게 하였다.
또한 차의 대량 생산과 더불어 780년부터 차에 대해 처음으로 징세가 시작됐다. 징세의 이면에는 대자본을 운영하는 상인들이 염상 외에 차상이 새로운 거대자본 상인으로 등장한 데 있다. 차가 소금처럼 전국에 유통되는 상품으로 성장한 것이다[5]. 차에 대한 징세는 각 지의 요로에서 차 가격의 10분의 1을 거두어들이는 상업세의 성격으로 부과됐다. 835년부터는 차에 대해 전매를 시작하였는데 이는 부과세 징수에서 업그레이드 되어 전매를 통해 국가에서 생산과 판매과정을 장악하고 그 수익을 적극적으로 흡수하는 형태로 변화를 줌으로 국가 재정의 확충을 가져왔다.
차 문화가 북쪽 사람들의 일상 속에 스며들게 된 것에는 불교 승려들의 영향이 컸다. 봉연의 <<봉씨문견기>>에 따르면, “개원 연간에 태산 영암사에 항마사가 있었는데, 선종을 크게 일으키고 선을 가르쳤다. 잠을 자지 않았으며 또한 저녁 식사를 하지 않았는데, 차를 마시는 것은 허락했다. 사람들이 품에 끼고 도처에서 차를 끓여 마셨다. 이때부터 효험이 알려졌고, 드디어 풍속을 이루었다”[6] 라고 얘기하면서 승려가 차를 전파함에 있어서의 긍정적 역할을 설명하였다. 북쪽 사람들에게 있어서 차는 이젠 더이상 남쪽 사람들만 마시는 이상한 음료가 아닌, 심신을 수련하는 승려가 마시는 효험 좋은 음료로서 차를 인식하게 되었고 긍정적인 이미지가 사람들에게 각인되었다.
이 시기에 차 문화 발전에 획기적인 역할을 인물이 배출 되었는데 그가 바로 육우다. 육우는 다선, 다성, 다신이라는 칭호를 갖고 있는바 당시 불교 신앙의 확산과 함께 차를 마시는 풍습이 전국적으로 전파되면서 차 문화가 완성 단계에 이르렀고 차를 마시는 방법 또한 규범화 되어가고 있었는데 차를 마시는 방법을 문서로 집대성한 사람이 바로 육우다. 육우는 그의 저서 <다경> 을 통해 차에 대한 지식을 소개하고 차를 끓여 마시는 방법을 제시했다. 육우의 노력을 통해 당시 사찰에서의 다례와는 다른 민간 차원의 다례가 형성되었다. <다경>은 차에 관한 내용이 워낙 정리가 잘 되어있어 지금까지도 널리 읽히는 최고의 다서로 평가받고 있다.
안정적인 생산과 유통을 기반으로 8세기 이후 차가 중국인들의 일상적인 음료가 되었고, 필수품으로 손꼽힐 정도가 되었다면, 송나라에 들어와서 차 무역이 더욱 활발해지고 찻집의 확산으로 차가 일상생활의 일부로 깊숙이 자리 잡고 여가생활의 하나로 되었다. 이는 사회적으로 귀족 사회가 끝나고 서민 사회로 나아가는 시점에 차 소비 또한 그 흐름을 탄 것으로 볼 수 있다. 대도시에서의 차 소비와 찻집 영업이 날로 번성해졌는데 송나라의 수도 개봉에서 찻집을 드나드는 것은 아주 일상적인 생활의 일부였고, 차를 마실 수 있는 곳 또한 노점에서 호화롭게 치장한 찻집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또한 이 시기의 찻집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였는바 특히 항주에 있는 찻집은 특정한 고객을 대상으로 하는 전문 찻집으로 발전했는데 야시장에서 서서 편하게 차를 마실 수 있는 찻집 외에 고급 손님을 주로 받는 찻집,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는 찻집, 사대부들이 모이는 점잖은 찻집, 기녀들을 앞세워 호객하는 요란한 찻집 등이 존재했다. 이는 도시에서의 차 산업이 일상에서의 활발함과 더불어 전문성까지 점차 구비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송나라 시기에 “일상다반사”, “개문칠건사” 라는 단어들이 유행했는데 그 중 “개문칠건사”는 하루 중에 꼭 필요한 일곱가지 생활필수품을 통칭해서 일컫는 말인데 이 일곱가지는 땔나무, 쌀, 기름, 소금, 장, 식초 그리고 차였다. 이는 차가 단순히 기호품의 정도를 넘어서 생활에 밀착된 음료로 발전했음을 잘 보여준다.
서민사회로의 이행과 함께 다수가 차를 공유하게 되었다고 해서 특별한 가치와 독점적 소비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시기에 가치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귀한 차들이 출현했다. 송나라는 황실의 차를 민간의 차와 차별화하면서 황실차의 고급화를 극단적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황실차를 토공하는 공차제도는 차의 대중화가 시작된 당나라 때부터 시작됐지만 민간차와 차별화하려는 노력은 송나라에 이르러 정점을 찍었다. 이 시기에는 공차제도를 폐지하고 아예 황실 수요의 차를 복건의 북원에서만 생산하여 공급하게 함으로 최고급의 북원차를 황실차로 독점하게 되었는데 제일 대표적인 차가 바로 “백차” 와 “용단승설”이다.
또한 송나라 때 차마무역을 공식화했는데 이는 차와 말을 맞교환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말이 송에게 제일 필요한 품목이었고, 차는 주변 유목민족에게 필요한 품목이었기 때문이다. 차마무역은 주변 지역 유화 정책으로 효과가 높아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시행됐다.
원나라는 중국 차 발전의 절정이었던 송나라와 명나라를 이어주는 역할을 했다. 이 시기는 송나라의 떡차 제조 방식을 유지하는 한편, 잎차 문화로 점차 발전하였는데 궁중에서는 여전히 떡차를 마셨지만 민간에서는 점차 잎차를 즐겨마시기 시작했다.
명나라 때에 이르러 중국의 차문화는 잎차가 주류가 되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중국의 차는 덩어리차로 시작했고 덩어리차를 가루로 낸 말차를 마셔왔다. 그러나 명대에 이르러 명태조가 단차 제조 금지 정책을 실시하였는데 이는 단차가 제조 공정에 노력이 많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차를 만드는 방법 또한 증제병차법에서 증제산차법, 증제산차법에서 초제산차법으로 넘어갔는데 이 시기에 초제산차법이 주류가 되었고, 이는 그 이후 우롱차와 홍차 등 다양한 발효 정도를 가진 차를 개발할 수 있는 틀을 마련해주었다. 명나라의 주류 잎차 문화가 현대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그것이 중국인들의 일상에 다양한 맛의 차를 제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한국의 차 문화 발전 역사]
한국의 차 발전은 주로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로 나눠서 설명을 해보려고 한다.
차는 삼국 말기에 중국으로부터 들어왔으며 신라말기에 성행했다. 삼국사기에 “흥덕왕 삼년 겨울 십이월에 당나라로 사신을 보내 조공을 했는데, 당문종이 인덕전에 불러들여 연회를 베풀고 하사품을 차등 있게 내려주었다. 당에서 돌아온 사신은 차 종자를 가져오니, 왕은 지리산에 심게 했다. 차는 선덕왕때부터 있었으니, 이때에 이르러 성했다”[7]고 기재되어 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바 차가 처음으로 한국에 들어오게 된 것은 선덕여왕 때고 차가 성행하기 시작했을 때는 흥덕왕 때였음을 알 수 있다.
불교문화의 도입과 더불어 신라시대에 차가 들어왔고, 불교와 더불어 차가 전파하게 되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경덕왕이 승려 충담을 만나서 대담을 하는데 경덕왕이 승려에게 어디서 오냐고 물으니 승려가 “3월3일가 9월9일에 차를 달여서 남산 삼화령의 미륵세존께 드리는데 지금도 차를 드리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대답했다. 이 대답을 들은 왕이 왕한테도 한잔 줄 수 있냐고 물었더니 승려가 차를 달여서 올렸는데 차의 맛도 이상하고 찻잔속에서 이상한 향기가 풍겼다고 기재되어 있다[8]. 또한 왕건은 차를 선물로 사용했는데 931년에 왕건은 신라 왕과 백관, 군민과 승려에게 선물을 보냈는데 신라 왕에게는 안장을 갖춘 말과 능라채금을, 백관에게는 채백을, 군민에게는 차와 복두를, 승려에게는 차와 향을 주었다고 한다. 이로부터 알 수 있는바 이 시기에는 차를 불전에 공양하고 임금께 공헌하는 도구로 사용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기의 차는 중국을 다녀올 때면 반드시 구입해야 하는 선호도 높은 물품 중 하나였는데 그것은 최치원의 <급료를 요청하는 글> 중 “ 본국 사신의 배가 바다를 건너간다고 하니, 차와 약을 사서 집으로 부치는 편지에 함께 보내려 합니다”라는 구절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또한 이 구절에서 알 수 있는바 일반 가정에서 차와 약을 함께 소비했다는 것이다. 의료 혜택이 부족했던 시대에 차의 약용적 음용은 일반적인 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는 차 문화의 번영기라고 할 수 있다. 불교국인 고려에서 차는 신라시대보다 더욱 번성하여 모든 불교적 의식의 필수품이 되었다. 이 시기에 고려 최초의 토산차가 생산되었는바 전라남도에 뇌원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이 곳에서 생산되어 “뇌원차” 라고 불리었다. “뇌원차” 는 고려 왕실이 사용한 대표적인 덩어리차였는데 왕실에서 부조 물품으로 쓰이고 상례를 행할 때의 대표적인 물품으로 쓰였으며 원로나 퇴직관료에게 하사하는 물품으로도 쓰였다. 이는 한편으로 차가 사교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차 문화의 발전을 가늠함에 있어서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생산과 소비의 활성화 여부인데, 고려시대 차 생산지에 관한 기록은 매우 드물지만 조선시대에 간행된 <세종실록지리지> 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 때 차를 토공했던 기록이 나온다. 경상도에서는 밀양, 진주,울산, 함양, 산음, 고성, 하동, 진해가 있었고 전라도는 고부, 옥구, 부안, 정읍, 나주, 영암, 고창, 영광, 무장, 남평, 무안, 흥덕, 장성, 장흥, 담양, 강진, 순창, 순천, 무진, 낙안, 고흥, 보성, 광양, 구례, 진원, 동북으로 거의 전역에 걸쳐 있었다. 이 중에서 특정 생산물을 공물로 확보하기 위한 다소는 총 열여덟 곳이었는데 경상도에 두 곳, 전라도에 열여섯 곳이었다. 다소를 통해 국가는 차를 지역 생산물로 해서 세를 거두었음을 알 수 있다. 차가 세금의 기능을 하게 된 것이다.
차의 소비로 봤을 때, 이 시기에 다점과 다정, 다원이 있었다. 도시를 중심으로 거리에 차를 파는 점포가 있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목종의 말로 알 수 있다. “
“근래에 시중 한언공이 상소를 올려 말하기를 ‘지금 선대를 계승하여 돈을 사용하게 하고 거친 베의 사용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풍속이 어그러지고 나라의 이익도 이루지 못하고 다만 백성의 원망과 탄식만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라고 했다. 차나 술을 파는 여러 점포가 교역할 때는 종전대로 돈을 사용하게 하되, 그 밖에 백성이 사사롭게 서로 교역을 할 때에는 임의대로 토산물을 사용하도록 하라”[9] 목종의 아버지인 성종은 처음으로 철전을 주조하고 화폐의 유통을 활성화하기 위해 화폐를 전용케 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화폐정책의 실패로 목종은 이전 방식으로의 회귀를 택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차와 술을 파는 점포에서는 돈을 사용한다는 것은 상업 활동이 이루어지는 거리에서 찻집이 영업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백성들은 토산물을 사용할 수 있도록 규정하면서 사실상 찻집은 백성들이 쉽게 드나드는 곳이 아님을 은연중에 보여준다. 비록 일상적으로 차를 소비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졌지만 실제로는 제한적이고 특정적인 소비가 주를 이루었다. 또한 이 시기의 차 소비는 도시를 중심으로, 특히 사찰문화와 문인의 문화속에서 뿌리내리고 있었고 다정이라고 하는 차를 마시며 노는 정자도 보통 사원 안에 있었다. 또한 이 시기에 중국차에 대한 선호도가 매우 높았는데 특히 납차와 용봉단차를 귀하게 여겼다.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 이장 터에 있던 가야사의 돌탑에서 용단승설이 나왔다는 이야기도 중국차에 대한 기호 이상의 선호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는 한편으로 고려의 차 생산을 위축시켰고 나아가 고려의 차 생산이 성장할 여지를 일찌감치 저애하였다.
불교국이었던 고려와 달리 조선시대는 불교를 배척하였고 불교와 함께 성했고 사원과 함께 전파되었던 차 또한 쇠퇴하게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왕실과 문인들이 차를 즐겨마셨다고 하면,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왕실에서 차를 마시지 않았다. 그 근거는 세종대왕의 말에서 찾을 수 있다. 1430년 겨울 세종은 경연에서 중국의 각차법을 논하면서 “중국에서는 어찌 차를 좋아하면서 엄히 금하는가? 우리나라는 궐내에서도 차를 쓰지 않는다. 좋아하는 것이 각각 다르기가 또한 이와 같구나” 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알 수 있는 건 조선 궁중에서도 차를 마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조선 전기부터 차 문화가 얼마나 위축됐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이 시기의 차 문화는 문인들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다산 정약용,신위,초의선사, 홍현주, 이유원 등의 문학 작품이 다수 남겨진 시대이고, <부풍향차보>, <동다기>, <동다송>, <다신전> 등 차 관련 책들이 출간된 시기이기도 하다. 때문에 차 문화의 중흥기라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 시기 차 문화의 중심은 일부 문인들이었고 차 문화가 백성들한테까지 보급되지 못했다. 또한 문인들의 중국 고전에 집착하였는데 차에 탐닉했던 사람들은 육우가 썼던 <다경>을 그대로 재현하고자 했고, 송대 사대부의 감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문인들이 찻물 끓는 소리에 대한 감상을 즐겼다는 것 또한 조선 다인의 특징이었다. 중국에서 잎차로의 발전단계로 넘어갈 때에도 문인들은 여전히 떡차와 말차를 고집했고, 이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출구의 문을 닫아버렸다.
무엇보다 조선에서 차는 사치품이라는 인식이 다분하게 존재했다. 절용(節用)을 강조하는 유학을 숭상하던 조선에서 재정을 낭비하지 않는게 중요했고 이러한 사상은 국가재정의 소비 뿐만 아니라 국왕을 포함한 모든 지배층 및 전 백성들에게 관철되었다. 때문에 차가 조선시대 사람들에겐 사치품으로 여겨졌을 가능성 또한 존재하고, 이로 인해 차가 대중화 되지 않았을 것이다.
[중국과 한국의 차 문화 비교]
중국과 한국의 차의 발전역사를 봤을 때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존재한다. 우선 충분한 공급이 있었다. 중국의 경우 차의 기원이 중국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초기부터 충분한 양이 생산되었고, 세계적으로 소비가 확대되는 시점에도 생산 지역의 확대가 수월하게 이루어졌다. 한국의 경우, 중국으로부터의 지속적인 차 유입과 더불어 자체 토산차를 생산함으로 공급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으로 차는 단순히 사람들이 마시는 음료에 국한되지 않고 두 지역에서 모두 문화를 갖추게 되었다. 단순한 물질적 소비를 넘어서 인간의 활동을 표출하는 다양함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한국과 중국의 녹차 문화는 일찍이 불교문화와 접목되면서 구도적인 성향을 보여주었는바 생활, 건축, 회화 등 다방면에 그 결과물이 남아있다.
또한 두 나라에서 모두 차의 기능성을 인정하고 약용 가치가 있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건강에 대한 관심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데 차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기능성은 맛과 함께 누구에게나 매력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중국과 한국에서 차 문화는 모두 국가 통치자들의 정책 영향을 심하게 받았다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차 전매제도, 황실차와 일반차의 차별화 등을 통해 차 생산의 명맥을 유지시켰다면 한국에서는 왕조의 종교적 성향에 따라 차 생산에 대한 중시도가 계속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 나라의 차의 발전 역사는 극명한 차이점을 보여준다.
첫째로, 중국의 차 문화는 비록 전파 과정에 있어 불교 승려들의 영향이 컸지만 궁극적으로 평민들의 일상생활 속에 깊이 스며들었다. 또한 평민들이 자유롭게 차를 소비할 수 있는 다방과 다원 또한 평민들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대중화와 차별화가 진행 됨으로 차 산업이 더욱 활성화 되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차 문화가 일반 대중에게 보급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차를 마시는 문화가 단순히 왕족, 학자, 승려들 중심으로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비록 다방, 다정 등 차를 소비할 수 있는 곳이 형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화폐의 불충분한 발전 등 원인으로 평민들이 차를 소비할 수 있는 여건이 부족했던 것도 차 문화의 대중화가 한국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원인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대중들의 인식하에 차는 음료보다 약용적 가치로 인식되었던 것도 대중화가 이루어질 수 없었던 또 다른 원인이다.
둘째, 중국에서는 차 생산이 발전함에 따라 황실차를 따로 재배하는 방법을 통해 차의 품질과 가치를 높이고 일반차와 황실차의 구분을 두었지만, 한국에서는 토산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차를 고급 차로 평가하였다. 그 이면에는 문인들이 중국 다예와 다서에 대한 맹목적인 추구와 중국 고전을 재현하려는 “소중화” 사상이 적극적으로 작용하였고 실질적인 차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였음을 보여준다.
셋째는 중국은 떡차, 말차로부터 잎차로 발전하면서 차 제조기술의 비약적인 발전과 더불어 우룽차, 백차, 홍차 등 발효차까지 제조하게 되면서 다양한 맛의 차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지만, 한국은 조선시대 후기까지 여전히 떡차가 주류였다. 그 이면에는 조선 후기의 차 생산이 매우 위축된 것의 원인과 더불어 옛것을 숭상하는 주류 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차의 약용적 효과를 매우 중요시 하였기에 약재를 만드는 것과 같은 “구증구포” 방식, “삼증삼쇄 “ 방법을 계속 견지하였고, 찌고 말리는 방식의 떡차를 견지하게 되었다. 차 산업에서의 변화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출구의 문을 닫아버리게 되었다.
이외에도 언어습관의 차이에서도 중국과 한국의 차이가 존재한다. 중국에서는 차정 속에 찻잎을 넣어 끓이는 것만 차라고 하지만 한국에서는 인삼차, 보리차와 같이 찻잎과 상관없는 음료도 차라고 한다. 물에 끓이거나 뜨거운 물에 우려내 마시는 방법 상의 공통점이 작용한 것들을 통칭해서 “차” 라고 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이런 언어습관 또한 차를 대하는 태도에 있어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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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tington .Samuel. P. 1996. The Clash of Civilizations and the Remaking of World Order. New York: Simon & Schuster
[1]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0
[2] 조기정,장현화, “중국차의 대중화 과정 고찰”, 中國人文科學 第69輯, 2017
[3] Huntington.Samuel.P. 1996. The Clash of Civilizations and the Remaking of World Order. New York: Simon&Schuster
[4] 서은미, <녹차 탐미 – 한.중.일 녹차 문화를 말하다>(2017) , 서해문집, 136쪽 참조
[5] 서은미, <녹차 탐미 – 한.중.일 녹차 문화를 말하다>(2017) , 서해문집, 139쪽 참조
[6] 封演, 《飲茶》, 《封氏聞見記》 卷6
[7] <삼국사기> <신라본기> 권 10
[8] <삼국유사>, <경덕왕조>, 권 2
[9]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권2 <목종선양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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